‘나’, ‘주를 찬양’, ‘주의 은혜라’ 등 수 많은 찬양곡으로 한국 CCM을 이끈 최덕신 목사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찬양사역자에서 목회를 하기 까지 삶에 이야기를 나누었다.
목사님 만나 봬서 반갑습니다.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찬양 사역자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3년 전부터 일본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으며, 작년부터 도쿄에 ‘Freedom Tokyo’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고 있는 선교사, 목회자, 찬양 사역자 최덕신입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을 언제 인격적으로 만나셨죠?
저는 모태신앙으로 교회 울타리 안에서 성장했으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교회에 다니는 형으로부터 도전을 받았는데 형은 저에게 “형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형제의 죄 때문에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믿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나를 돌아보게 되었고, 내 믿음에 대한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대학교에 입학해서 한국제자훈련원에서 주최하는 3박 4일 말씀 훈련에 참가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성령의 강한 임재를 체험하게 되었고, 비로소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존재가 깨달아졌습니다.
찬양 사역자로 부르심은 언제 받으셨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한 후 나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뜻과 계획이 있다는 것이 믿어졌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렸으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무엇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하다 유학을 결정하고 준비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청소년들을 위해 일할 자가 필요하다.”는 부르심을 주셨고, 그 부르심에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큰 감동과 확증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청소년 사역을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던 차에 하나님은 우연한 기회에 송명희 시인을 만나게 하셨고, 그분의 시에 곡을 붙여 ‘나’라는 찬양곡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청소년들에게 그 노래가 불리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청소년을 위한 찬양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찬양곡을 만드셨는데 그 곡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제가 쓴 곡이 300곡 정도 있는데 의뢰를 받아 쓴 곡도 있고, 오랜 시간 기도와 묵상을 통해 쓰인 곡도 있고, 예배 시간에 설교의 한 구절이 모티브가 되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혼자 말씀 묵상과 큐티를 하며 감동이 몰려올 때는 10분 만에 곡이 완성되고, 30분에서 1시간 고뇌하며 쓰이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로 곡이 쓰이나 의도적으로 쓰인 곡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주를 찬양’ 곡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그 곡이 쓰일 당시 역대하 20장 말씀을 읽고, 영적 전쟁에 대해 깊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것”, 감사에 원어에 뜻은’ 손을 들고 찬양하는 것’이라는 배움에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그 울림이 지속해서 가슴 한구석에서 메아리치며 화장실에서 결정적인 멜로디 라인과 가사의 모티브가 확 풀어졌습니다. 그 곡은 화장실에서 일을 보며 완성된 곡입니다. (웃음)
영감을 받아 곡을 쓸 때 가사가 먼저인가요 멜로디가 먼저인가요?
가사, 멜로디가 따로 떠오를 때도 있으나 60~70%는 가사가 가진 이미지와 멜로디가 동시에 매칭되어 떠오릅니다.
찬양 사역자로 가장 보람을 느낄 때?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음악 파트를 맡아 봉사했기에, 청소년들이 즐겨 부르는 찬양곡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찬양이 뭔지도 모르고 찬양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찬양 사역자로 나 자신이 가장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찬양 사역을 통해 예배를 배우게 되었고, 말씀을 가까이하며 30년 넘게 찬양 안에서 살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제가 쓴 찬양곡들이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불리고, 제가 만든 찬양을 통해 받은 은혜를 간증할 때 이 모든 일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제 후배 중에는 노래 한 곡 불러 일억을 받는 친구가 있습니다. 찬양 사역자는 거기에 비하면 1/10밖에 받지 못하지만 저는 그 친구가 전혀 부럽지 않습니다. 아니 그 친구가 저를 부러워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큰 영광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간은 언제였나요?
17년 이혼을 하게 되었고, 많은 분에 질타를 받았습니다. 그 힘든 시간을 담은 내용에 책으로 출판했는데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공인이고, 찬양 사역자이기 전에 연약한 인간이고 신앙인입니다. 그 사건이 인터넷과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며 많은 분들이 저를 비난했습니다. 찬양 사역자로 무너진 삶을 회복해보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그 일로 가장 상처를 받은 것은 저와 가족입니다. 두 아들과 믿음 안에서 힘겹게 극복하는 처절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이 제 삶에 가장 힘든 시간으로 제 인생에 40대는 하나님이 나를 만들어 가시는 침묵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을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합니다.
그 시간이 있었기에 50대에 다시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을 수 있었고, 10년에 힘겨웠던 과정들이 밑거름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시간은 찬양 사역자로 보낸 화려한 시간보다도 하나님과 깊은 교재로 나를 만들어 가는 소중한 시간이었으며 그 시간이 없었다면 제 사역에 다음 페이지는 없었을 것입니다.
찬양 사역자로 화려한 조명 아래 바쁜 시간을 보낼 때는 하나님을 마음 한구석에 밀어놓고 내 일에 바빠 분주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불미스러운 일 이후 사람들은 내 곁을 떠났고, 아무 데서도 불러주지 않았고, 나에게는 오직 하나님만 남았습니다. 그 시간은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었고, 어디부터 잘못되었는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둘러싼 화려함과 무거운 짐들이 다 떨어져 나간 지금이 저는 가장 평화롭고, 자유롭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하나님이 정금같이 빚어가시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언제 본격적인 선교사 사역을 시작하셨죠?
약 3년 전부터 일본 선교사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을 일본에서 지냈고, 일본 땅을 떠난 이후 40년 만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게 되었죠. 하나님은 오래전부터 저를 일본 선교사로 부르려고 계획하고 있지 않으셨을까 생각합니다.
선배 찬양사역자로서 현 사역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요즘은 찬양 사역이 예배 사역에 큰 비중을 두고 있으나 예전에는 ‘복음 전도 특공대’라는 정체성으로 군부대나 학교를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요즘은 찬양 사역이 교회 안에 성도를 위로하는 컨셉으로 바뀌었는데 모두 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찬양 사역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아닌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내가 드러나날 때 예배의 방해꾼이 될 수 있고, 주님이 받아야 할 영광을 내가 차지하게 될 수 있죠. 사탄도 원래는 예배 인도자였으나 하나님을 높여야 하는 자리에서 자기가 높아지려 했죠. 찬양 사역은 드러나는 사역이기에 자기도 모르게 주목을 받는 존재가 됩니다. 어머님은 저에게 항상 “교만하지 마라 교만하면 하나님이 안 쓰신다.”고 하셨는데 찬양 사역자로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 ‘교만’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의 비전과 계획을 말씀해주세요.
5~6년 전 중국 선교를 준비 중 모든 중국 사역에 길이 다 막혔었고, 일본에서 집회를 인도 중 하나님은 “이곳이 네가 복음을 전할 곳”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의 비전은 더 많은 일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사람들과 함께 이스라엘까지 복음이 전하는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일본에 복음화와 더불어 이스라엘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하나님을 소개해주세요.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시며 언제나 옳으신 분입니다.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이 문장이 표현하는 그대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