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엔 바이블(CINEMA & BIBLE) “바벨”(BABEL)
진행: 민효식 전도사, 김미아 리포터
‘바벨’ 진실이 소통되지 않는 세계…
바벨(Babel) 단어의 뜻은 혼란, 혼돈이다. 우리는 상식이 통하지 않고 소통이 단절된 시대에 살고 있다.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 속에 살고 있다.그것은 결국 바벨(혼란)이자 카오스(무질서)이다.
영화는 구약성서 속에 나오는 ‘바벨탑’을 모티브로 삼았다. 태초에 인류는 하나의 공동 언어를 사용했다. 그들은 도시를 건축하며 ‘하늘에 닿는 탑’을 세우기로 한다. 이에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과 언어를 혼돈시켜 멀리 흩어지게 하였고, 탑 건축은 중단된다. 그래서 이 지명을 바벨(Babel) 또는 바빌론(Babylon)이라 불렀다. 오늘날 바벨탑은 실패한 연대의 상징이자 외로움의 시초, 패배의 상흔이 됐다.
영화를 감독한 알레한드로 G. 이냐리투 감독은 지역과 언어가 다른, 언어가 같더라도 생각이 다른, 설사 생각이 같더라도 마음이 다른 여러 관계를 보여줌으로써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인간상을 제시한다.
바로 여기에서 왜 ‘바벨’이 제목인지가 드러난다. 바벨탑 신화의 핵심은 본래 인간이 한 군데 모여 있었다는 데 있다. 알레한드로 G. 이냐리투 감독은 일본인 남자가 모로코인에게 총을 줬고, 그의 자식들이 쏜 총에 미국인 부부가 맞았으며, 멕시코인 보모가 그 부부의 아이를 돌본다는 설정으로 각자의 사연을 결말에서 한 데 엮는다.
창세기 11: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바벨(BABEL)
현대는 이제 첨단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마트폰과 인터넷으로 이제는 통역도 기계가 해주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첨단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중에 요즘 제일 크게 부각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소통입니다.
2006년에 개봉한 영화 “바벨” 은 성경에서 나오는 바벨탑에서 나온 이름이며, 제가 바벨탑에 대해 짦게 설명을 드리면 창세기에서 사람들이 한 언어로 모두가 소통할수 있자 하나님이 계신 하늘까지 높은 탑을 한번 쌓아보자 라는 생각을 하나님께서 그들이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고 높여보자는 자기 중심에서 교만해지는 잘못을 하자 언어를 여러 개로 흩으셔서 사람들의 이 공사는 중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벨이란 영
화제목은 “혼돈” “Confusion”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요즘 세상에서 폭력이 난무하고 인종차별과 정치와 경제적 여건들 각자 사람들이 다르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분(social class)이나 생각 대한 충돌의 이슈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을 보게되며 이 영화를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영화의 시작은 맨먼저 부부인 브레드 피트(리차드)와 아내(수잔)이 모로코로 미국 사람들과 단체 관광을 떠납니다. 이둘은 3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제일 어린 자녀가 죽게되자 부부사이에 생긴 갈등의 벽을 허물기위해 여행을 온것입니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도중 수잔은 관광버스에서 창밖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혼절해서 쓰러집니다. 남편이 창가를 보자 총알 구멍이 뚤려있고 어디서 날라온지는 모르는 총알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버스는 갑자기 난리가 나고 현지 가이드는 사색이 됩니다. 그리고 모든 관광 투어의 일정은 취소가 되고 버스는 목적지를 바꾸어 가까운 마을로 갑니다. 일단 응급처치를 하지만 더 지체가 되면 수잔의 생명이 위험해 집니다.
사실 수잔이 맞은 총알은 엉뚱하게도 버스가 지나가던 시골마을에 살던 두 형제(초등학생들)들이 서로 아버지의 사냥총을 몰래 들고나가 지나가던 목표물을 버스로 삼아 쏘다가 버스에 타고 있던 수잔이 맞은 것입니다.
아내를 살리기 위해 마을에서 위성전화를 구해 구조헬기도 부르고 미국 영사관에게 이 사고에 대해 알린 남편 리차드를 통해 미국 정부는 모로코 정부에 압력을 넣습니다. 빨리 이 총을 쏜사람들을 체포하라구요. 모로코 경찰들은 완전 무장을 하고 수잔이 총을 맞은 그 지역의 민가들을 샅샅히 다 조사를 합니다. 그리고 두 소년의 아버지는 집에 오던길에 모로코 경찰들에게 총에대해 질문을 받게되고 자신의 아들이 이 사건을 일으킨 것을 알고 아들이 잡힐까봐 당장 도망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도망치다 경찰과 맞닥트린 소년(총을쏜 형)은 경찰들의 총에 맞고 죽습니다. 아버지는 오열하며 아들의 죽음을 슬퍼합니다. 형은 동네의 호기심 많은 꼬마의 신분에서 자신이 왜 총을 쏘게 되었는지 이유도 대지 못하고 바로 범범자의 신분으로 취급되며 미국정부의 압력을 받은 모로코 경찰들에게 사살됩니다.
또 다른 이야기는 그 사이 모로코에 여행을 떠난 리차드와 수잔의 2 아이들은 미국의 집에서 멕시코인 보모 아밀리아 에게 맏겨졌습니다. 그런데 이 보모 아밀리아가 멕시코에서 자신의 아들의 결혼식에 참여하게 되어있었는데 수잔이 여행 중 사고를 당해 아이들을 약속된 기간보다 더 돌보게 되어 아들의 결혼식에 갈수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리차드와 수잔몰래 아이들의 여권을 꺼내 운전을 하고 국경을 넘어 아들의 결혼식에 다녀옵니다. 그런데 다시 미국으로 넘어오는 국경세관에서 직원에게 이아이들이 자신의 손녀 손자들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는데, 세관 직원이 아이들에게 직접 물어보자 이 보모는 자신들의 할머니가 아니라고 하자 체포당하기 직전 차를 몰로 도망을 칩니다.
아밀리아는 나중에 멕시코로 추방을 당합니다. 미국에서 그렇게 열심히 일하였고 아이들에게도 헌신적으로 보모의 역할을 하였지만, 불법으로 아이들을 부모의 허락없이 국경을 넘었기에 이방인 취급을 당합니다.
물런 총을 쏜 소년과 멕시코인 보모는 법을 어긴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스토리와 이유를 다 듣지도 않고 공권력은 그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습니다. 당연히 법은 어긴 것은 잘못입니다. 하지만 영화의 포커스는 공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들을 이해해주거나 이들의 내용을 그 누구도 듣지 않았음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정치적인 문제를 야기하거나 공권력을 탓하자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문제보다는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주는 소통의 기회가 우리 사회에서 사라졌음을 이 영화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소통하지 못함을 많이 발견합니다. 어른세대와 신세대들 그리고 부모님과 자식들, 남편과 아내, 직장상사와 부하직원, 내 척도대로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데로 상대방의 모습은 나의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상대방의 말도 듣지 않고 내 눈에 보이는데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을 우리는 자주 경험하기 때문이죠. 남의 입장에서 조금더 생각해보고 것 모습보다 내면의 모습을 조금 더 생각한다면 우리가 살면서 다른 사람들과 더 소통이 잘 되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요? 우리는 여전히 눈에 보이는것으로 내 자신의 잣대로 상대방이나 상황을 판단하려 합니다. 그러다 보면 남의 입장이나 그 사람의 사연을 듣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반대로 소통의 문제는 내가 남에게 꼭 알려야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이 정말 말하기 힘든 부분일때에 그리고 남이 당연히 나를 배려해주겠지 알아주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말하지 못하고 상대방도 알지못할 때 오는 소통의 문제와 갈등이 있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다른사람에게 알리고 나의 생각을 올바르게 전할때에 소통을 더 잘됩니다. 하지만 어쩌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그냥 남이 알아주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이 우리의 소통을 막기도 합니다.
사실 이 영화에는 1가지의 소통의 문제를 제기하는 스토리가 있습니다. 총 3개의 스토리가 한데로 어우러지며 하나의 이슈를 제기합니다. 우리는 그리고 나 자신은 내 주변의 사람들과 얼마나 잘 소통하고 있는가?
잠 18:13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듣기를 더 잘하고 남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해보며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조금 더 있다면 우리가 소통이 더 잘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